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너럴 셔먼호 사건 (문단 편집) == 후세의 평가 == '''역사상 이양선(異樣船)과의 첫 무력 충돌 사건'''이다.[* 굳이 거슬러 올라가면 [[나선정벌]]도 [[러시아 제국]]과 싸웠으니 서양과의 무력충돌이라 할 만하지만 그때는 조선군 단독으로 싸운 것이 아니었으며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달리 국경선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관한 사료는 꽤 많으나 남아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조선 기록이다. 반면 제너럴 셔먼호의 입장을 담은 사료는 없다.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가 아무도 없으니 기록이 남았을 리가 없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양측의 충돌 경위를 따지기는 중요한데,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가름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생존자가 있다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주장했을 가능성도 크지만,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 근거로 삼는 종교 박해를 무조건 선전포고라며 기록한 걸 봐도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동시대에 박해를 겪었던 천주교의 처지와 대비된다. 병인박해 때 천주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기록은 조선 조정의 <추안급국안>이나 <승정원일기> 혹은 <일성록> 등과 크로스 체킹이 가능하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선 당시 신앙 공동체가 전무하여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수집할 수 없었고, 무려 사건이 발생한 지 40년 ~ 50년이 지난 다음에야,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수집하였고 글로 남겼다.] 당초 제너럴 셔먼호를 두고 조선 조정은 다른 이양선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접하여 돌려 보내려고 했다.[*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해서 보내는 것을 유원지의(柔遠之義)라고 한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평안도 관민들은 세 차례에 걸쳐 쌀, 고기, 계란, 채소, 땔감 등을 대주었다. 그러나 조선 측에서 수교만큼은 거절하였고, 이에 반발한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중군 이현익을 납치했다. 이는 모든 기록에서 일치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기록이 <패강록浿江錄>이다. 이 책은 이현익의 아들 이흥근이 쓴 것이다. 이에 따르면 문정에 나선 진사 안상흡이 만약의 경우 제너럴 셔먼호를 퇴치할 방안을 적은 문서를 든 채 배를 타고 이현익에 앞서 접근했다가 제너럴 셔먼호에서 띄운 소청선에게 그 문서를 빼앗긴다. 그리고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그 문서를 통해 조선 측에서 선원들을 회유해 상륙시킨 뒤 몰살하려는 계획을 알아내고 이현익이 탄 배를 나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게 원인이 되었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당시 조선 정부의 공식대처방안과 제너럴셔먼호사건 당시의 평양감영 대처방안은 통상/수교는 안되지만 인도적 입장에서 최대한 도와준다는것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했었다.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 이 사건의 책임은 국경을 침범하고 조선 관원들의 요구를 무시하며 함부로 무력을 사용해 조선 민간인들을 살상한 뒤 군인을 납치하기까지 한 제너럴 셔먼호에 있었다. 미국도 1867년 1월 슈펠트(Shufeldt,R.W)의 탐문 항행과 1868년 4월 페비거(Febiger,J.C)의 탐문항행으로 승조원이 도발적 행동을 해서 화를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거두가 되는 [[박규수]]가 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세력의 강력함을 두 눈으로 경험하고 후학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